초6 말,
대한민국 최고의 학생들이 가는 고등학교가 있단 얘기를 듣는다. 거기에 가겠다고 마음에 불을 지핀다. 어디서 나온 열망일까? 그런 열망만큼은 내게 주어진 선물인가.
중학교 3년,
그 학교에 가겠다고 죽어라 공부한다. 스스로를 자학하는 버릇도 이때 생겼다. 엄마랑 갈등도 많았다. 힘든 걸 엄마한테 풀려고 했으니까. 어찌됐든 결과는 성공이었다.
고등학교 3년,
국내 최고의 학생들이 모인 학교에서 적응하느라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다. 나름 추억도 있었겠지만, 심한 짝사랑을 하다가 성지향성을 깨닫고 가장 아프게 끝나버린 이야기가 됐다. 한동안은 기억에서 지워버렸던 시절.
대학교 2년,
외국에 무작정 가서 보낸 세월이다. 그 전엔 외국에 살아본 적도 없었고 가족 중 외국에 나가 산 사람조차 한 명도 없었다. 어디서 나온 용기였을까? 그런 과감함과 열망같은 건 내게 주어진 천성인가보다. 외롭고 힘들고 방황하고 정돈되지 않은, 매학기마다 인간관계가 엎어질정도로 불안정한 시절이었다.
다시 대학교 2년,
방학 중 한국에 돌아왔을 때 엄마의 말 한 마디에 한국행을 결정했다. 그만큼이나 미국 생활이 힘들었겠지. 힘들때 아무한테도 기대본 적 없는 사람이었다 나는. 마침 학점도 편입학할 정도가 쌓였으니, 미국대학 중퇴를 결정하고 한국대학 편입학 준비를 해서 입학했다. 2년은 총 4년이 됐고, 휴학도 하고 부전공을 한다고 세월도 벌고, 사실 사회에 나가 돈을 벌 체력도 마음의 여유도 아직 갖춰진 상태가 아니라 생각했다. 학생의 울타리에 남아있고 싶기도 했다. 그렇게 졸업을 했다.
사회생활 시작,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취직했을 때가 딱 코로나가 터졌을 때였다. 하루에 기사 6-7개를 쓰면 퇴근할 수 있는 곳이었다. 업무가 여유로웠다. 동료, 선후배들과는 적당히 거리를 두는 그런 회사 문화였다. 그래서 1년을 넘게 버틴 거 같다. 무난하게, 그렇게. 기사를 쓰는 능력은 나름 발전을 해왔겠지만 그 회사가 추구하는 자극적인 기사를 쓰는 것에는 회의감을 쭉 느껴왔다. 그 회사를 다니면서 태어나 처음으로 (정말로 어쩌면 처음으로) 순수하게 '하고 싶은 것'을 시작해 볼 수 있었다. 바로 디제잉이다. 디제잉을 배우고, 데뷔 무대를 서고 하면서 음악하는 사람들도 조금씩 알게되고, 나름 재밌고 안정적이었던 시절.
첫 이직,
좀 더 감각적인 일을 하고 싶다 생각해 매거진 에디터로 이직했다. 패션 에디터가 직함이었다. 나중에 알았는데 그곳은 많은 사람들이 금방 퇴사하는 안정적이지 못한 곳으로, 그렇기 때문에 그렇다할 패션 쪽 경험이 없는 내가 들어갈 수 있었던 것 같다. 즐겁고 신기하고 설레는 시절였다. 같이 들어온 동료는 나와 동갑인데 경험이 많아 선배로서 많은 걸 알려줬다. 협찬 받은 패션 아이템을 정리하고 보내고 하는 그런 몸을 쓰는 일들이 있는 것도 뭔가 신선하게 느껴졌다. 사진 촬영하는 현장에 많이 나가게 되면서 남자 포토그래퍼들을 많이 만나며 처음엔 긴장도 하고 두려웠으나 나중엔 재미도 느꼈다. 그러던 중 회사 월급이 3번인가 밀리게 됐다. 생계에 위협을 느꼈다. 편집장은 가끔가다 툭하면 자기 감정대로 나를 대하기도 했다. 업무에는 체계가 없었다. 매거진 마감 시기에 가장 힘들었다. 적은 인원이 교정 교열을 모두 보고, 편집장은 감정대로 나를 대하면서 나를 울리기도 했다. 체계가 없고, 소통을 제대로 못했다 보니 생긴 일들였다. 그렇게 힘들게 버티며 다니다가 코로나에 걸렸고, 이직을 결심했다. 여러모로 안정적이진 못한 환경였다.
코로나 완치 후 이직,
여기도 매거진였다. 디지털 매거진이라 좀 더 개인적인 업무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회사는 매거진 팀에 기대를 거는 게 딱히 없었고, 나중에는 사무실마저 매거진 팀을 다른 곳으로 보내버렸다. 약간 왕따 당하는 느낌. 에디터는 나 포함 총 3명였다. 다른 에디터 두 명은 서로 쿵짝을 잘 맞추며 알게 모르게 내 의견을 무시하고 반박하는 일이 많았다. 나도 그들과는 그리 어울리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경력이 내가 더 많았고, 그 중 한 명은 나를 질투하는 거 같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참 힘든 일이 많았네 나는... 특히 결정적으로 사무실을 옮기고 나서 그 좁고 통풍안되는 사무실이 내게 너무 답답하게 느껴졌다. 그쯤 위염이 많이 심해졌다. 툭하면 위가 아팠다. 그쯔음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대출을 받을 수 있었고, 그 돈을 갖고 망가진 몸을 돌보며 좀 쉬면서 이직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회사가 나를 바로 잘 놓아주진 않았다. 퇴사하겠다고 했는데 한 한 달은 더 일했다. 사무실 공간이 너무 힘드니 재택하겠다고 말해서 재택으로 하긴 했다. 정말 나는 그 사무실이 너무 힘들었다.
이직 준비 하며 '쉰' 한 달,
쉬었다고 하지만 진짜로 쉬지는 못했다. 시간이 많아진 만큼 내가 이렇게 한시도 쉬지 못하고 생각이 많다는 걸 그때 느꼈다. 이런 저런 회사를 알아보며 음악 회사로는 소니 뮤직에 넣었지만 떨어졌다. 그러다 광고회사를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기획 같은 걸 해보고 싶다 생각해서. 또 연봉도 올라갈 거 같아서. 그래서 지원한 곳이 지금 다니는 회사다. 이 시기가 진짜 힘들었다. 회사가 결정되지 못해 불안정한 것도 있었지만, 내가 마음이 많이 힘들었던 시기같다. 회사 외의 것에 대해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했다. 어떻게 보냈는지 사실 기억도 잘 안나는 시절이다. 회사에 안정적으로 정착하고 싶은데 그게 잘 안된다는 생각에 불안했던 것일까? 퇴사를 정확히 언제했는지 달력에 나와있지도 않네. 그래도 퇴사하고 약 3주만에 새 회사에 출근한 모양이다. 많이 쉬지 않았구나. 올해는 여유를 갖고 여행도 다녀보고 싶다. 제발!
지금 다니는 회사-3개월이 넘어가고 있습니다,
광고회사에 다니고 있다. 건너건너 들은 적은 있는 거 같지만 정말 업무가 빡세다. 쳐내야할 것들이 많고 새로운 일들이 들어오면 거기에 집중해서 해야하고. 나는 지금 여기도 그만두려 하고 있다. 나는 언제까지 그만두고 다시 다니고 할 것이지? 그래도 갈때마다 느꼈다. 느껴온 세월이 길다. 지금 하는 일, 대체 왜 하려는 걸까? 내가 광고에 뜻이 있나? 이런 일을 대체 내가 왜 하고 있는 거지? 나는 디제잉을 하며 음악쪽 일이 좋다고 서서히 확인을 재차 해온 거 같다. 그래서 더더욱, 낮에도 음악쪽 일을 하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다. 사실 '일하기싫어', '다 무슨 의미래' 라는 생각은 계속 수없이 해왔지만, 방향을 바꿔 음악쪽으로 가도 괜찮아!를 생각하게 된 건 한 언니와의 술자리에서 나눈 대화 때문에였다. 언니는 음악쪽 회사에서 일하는데 업무 만족도가 100퍼센트란다. 그 회사로 들어갈 때 연봉을 많이 깎아 갔지만서도 일이 너무 행복하다며, 2년 넘게 다니고 있다고 한다. 또 하는 말이 음악쪽 회사에 다니면 내가 디제이로서도 이런저런 사람들 알아가는 데 도움이 될 거라는 거다. 모르겠다. 그 언니가 얼마나 진심으로 한 말인지는 몰라도. 언니도 업무 만족도가 높지만 나름의 고민이 있지 않을까? 그게 약간 계기가 된 거같다. 나도 하는 일에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 거 같다. 그런 사람을 눈 앞에서 본 건 처음이니까! 어쨌든 나는 빠른 시간 안에 감사하게 기회가 닿아 면접을 봤고 어제 합격 전화를 받았다. 그곳에 가게 되면 이제 공연기획자로서 일을 하게 된다. 6개월 계약직이라 다행이다. 뭘 자꾸 잘 그만두니까 내가! 여기는 연봉이 2/3수준이다. 따라서 나는 세컨드 잡이 필요하다. 세컨드 잡을 구하는 과정, 그것이 아직 미지의 세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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